傳統과 現代의 共存에 새 地坪 연 불[火]의 美學

그러나 현대교육을 도입한 최초의 주창자인 권순형은 도예가 갖는 역사성과 본질적인 진수를 송두리채 부정함으로써 생기는 도예사의 단절을 막기 위해서도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발현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실험을 거듭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세계는 구상과 추상, 전통과 현대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작품을 통하여 공존을 실증한 최초의 작가로 정상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이른바 기형과 표현의 양면성을 합일함으로써 종합예술을 구현한 작가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의 예술은 가장 완벽하고 균형잡힌 매끈하고 부드러운 기형의 표면에 우주의 신비로운 자연을 주제로 한 작가의 심상세계를 표출해 내는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활에서 느끼고 떠오른 만상(萬象)을 병이나 호(壺)가 지니고 있는 풍만한 표면에 사유의 철학으로 불어넣는 작업이라고나 할까. 본시 도자기는 열연(熱燃)으로 소성(燒成)되어 나오는 불〔火〕의 예술이며, 작가 자신의 심장의 고동소리와 숨결이 배어 있는 체험과 기다림의 미학인 것이다. 1300。의 고열에 산화염(酸化鹽)이나 환원염(還元鹽)의 소성방식을 즐겨 다루고 있는 권순형의 도자예술은 기형(器形)의 열전도에 따른 배열이나 포치의 변화에 의해 크게 성패가 좌우되는 디테일한 경험을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작가 자신이 되는 경지에서만이 성취되는 신비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맑고 빛나는 눈동자와 같은 신비와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갖게 된다. 갖가지 형상이나 이미지가 색유(色釉)를 매제로 하여 표면에 발색되는 아름다움은 한국미의 진수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시화(鄭時和) 교수는 10년 전 그의 작품의 평문에서 “권순형의 작품은 도자 제작에 있어서 정통성을 지키는 일관된 작업을 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정영목(鄭榮沐) 교수는 1996년 권순형의 16회 작품전의 평문에서 “1960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 온 권순형은 초기에 잠시 입체조형 형식의 작품을 제작하다가 곧 전통적인 도자기 형태를 바탕으로 하는 작업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후에 도자기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표면에서의 유약의 변주, 붓질에 의한 형태 등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 점이 그의 작품세계를 50년대 말의 소위 추상 1세대에 속하는 작가들의 경향과 함께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권순형의 도자 표면의 추상적인 형태를 단순히 색감의 번짐과 선의 흐름에 의한 율동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추상성은 거기에 꽂거나 담길 대상의 색상과 선의 - 상대적인 또는 총체적인 - 조화를 미리 예견한 추상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器)라는 측면에서 파생되는 조건을 배제하지 않는 상태에서 도자예술에서만이 갖는 특수성을 이해하고, 그 특수성을 다른 미술과의 차별개념으로 이론화할 때 비로소 권순형의 작품세계가 온전하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도자의 근본적인 조건을 접어두고 기물(器物)의 표면에 나타난 색감의 번짐과 선의 흐름만을 대상으로 논의할 때 역시 일반 회화에서 이야기하는 추상의 개념만으로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물론 순간성, 즉흥성, 우연성, 정신성 등의 전통적인 회화의 추상요소들이 도자에도 내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요소들은 그나마 이성적으로 배합, 조정, 통제하는 주체가 작가 자신이 아니라 ‘불’이라는 점은 근본적인 차별점을 시사한다.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진정한 우연성과 정신성이 작가의 체험과 일치하는 순간의 ‘불의 회화’라 부를 수 있다. 이 기물이 가마에 들어가고 작가가 불을 지피는 순간 도자는 작가의 일이 아니라 ‘불’의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 ‘불’을 궁극적으로 조장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이지만 - 마치 뱃속이 병든 의사가 자신의 내장을 시원하게 속속들이 볼 수 없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처럼 - 도자기 가마에 들어가 있는 모든 순간 순간, 도(陶)의 예(藝)를 실질적으로 집행하는 작가는 ‘불’인 것이다. 때문에 도예에서의 진정성이란 ‘불’이 작가가 되고 작가가 ‘불’이 될 수 있을 때에만 성립된다. 도자에서의 ‘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는다. 갖은 종류의 흙과 유약, 또한 그것의 재질과 성분이 천차만별의 색을 창출해 낸다 하더라도 일단 그것은 ‘불’을 먹어야 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재료에 관한 완벽한 연구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과 만난 후의 체험의 결과와 혼합된 즉 연구의 이성적 부지런함과 체험의 감성적 정신성이 결합되지 않는 한 정적인 도자의 형태에 생동감을 불어넣어줄 색감의 번짐과 유연한 흐름을 결코 얻어낼 수 없다. 어언 40년이 가까운 세월을 권순형은 ‘불’의 지배자로서 또는 순종자로서 도예의 장인정신을 잊지 않고 간직해 왔고, 그와 버금가게 온갖 색을 갖기 위한 실험성의 과학정신을 또한 겸비해 왔다. 그의 기물에 배어있는 이러한 진정성이 선과 색의 예사롭지 않는 추상성으로 표출되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고 평했다.
도심의 대형화와 밀집된 생활공간, 각박해져만 가는 우리의 사회환경은 정신문화의 빈곤과 정서의 결핍을 유발시키는 등 날로 그 정도가 심화되고 있다. 이럴 때 고층건물의 로비나 회의실, 야외 공간, 공원 등에 환경조형물 설치의 필요성은 절박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권순형은 국립극장, 국회의사당, 혜화동 성당, 프레스센터, 한국전력의 야외 공간 등에 세라믹 대형작품을 남겼다.

김남수 / 미술평론가